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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사채왕 현금부자 “단사천”

사채왕 “현금부자” 단사천 그의 이름을 들어본적 있는가?

사채업자라고 하면 고리 이자로 돈을 번 사람들을 떠올리고는 한다. 하지만 사채라고 하면 일부 거부감을 일으켜서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채업자는 돈을 빌려주는 시스템으로 오늘날까지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사채업자중에서는 그룹으로 만들어 양지로 나온 사람도 있고, 재산을 탕진해서 쓸쓸한 노후를 보낸 사람도 있다.

사채왕 중에서는 단사천 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채왕이 있었다. 단사천 회장은 명동 사채업계를 주름잡았던 인물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재계의 내로라하는 총수들에게도 돈을 빌려줬다고 전해진다.

하루에 수천억원의 현금을 움직여 사채업자들 사이에서는 ‘현금왕’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정주영, 이병철 회장도 손 벌렸던 ‘현금왕’이었다.

현대그룹 창업주로 재계에서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은 위세를 떨쳤던 정주영 회장도 단사천 회장에게서 연락을 받을 때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건설과 중공업, 자동차 등 대규모 사업을 펼쳤던 정 회장은 사업 추진 과정에서 자주 돈이 마를 때가 있었는데, 매달 직원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날처럼 큰돈이 필요할 때가 되면 은행에서 돈을 다 빌리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고 한다.

이때마다 정 회장에게 현금을 빌려주며 자주 급한 불을 꺼줬던 인물이 단사천 회장이었다.

삼성그룹을 일궜던 고 이병철 회장이나 다른 여러 재계 총수들도 사업을 확장하다 가끔 돈줄이 막힐 때면 단 회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부르면 기업 총수들도 두말하지 않고 달려온다’는 식의 무성한 소문들이 떠돌기도 했다. 사채업계를 주름잡았던 단 회장이 큰돈을 빌려주면서 기업이나 공장, 토지 등을 담보로 잡아 일부에서는 그를 ‘재계의 전당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1970년대 종합소득세 납부액 재벌들 제치기도 했다. 자신이 보유한 사채자금도 풍부했지만, 명동 사채업계에서 수많은 중ㆍ소규모 사채업자들을 거느린 ‘전주(錢主)’로 군림하며 재벌들이 손을 벌릴 정도로 큰 규모의 현금을 손쉽게 조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병헌과 김우빈이 찍은 영화 “마스터” 영화에서도 지하경제의 큰손이라고 불리는 할머니 회장이 있었다. 영화에서도 지하경제의 세계를 잠깐이나마 소개한적이 있다.

사채업계에서 수많은 중ㆍ소규모 사채업자들을 거느린 ‘전주(錢主)’로 군림하며 재벌들이 손을 벌릴 정도로 큰 규모의 현금을 손쉽게 조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은 사채업자들까지 동원해 자금을 빌려줬기 때문에 ‘지하경제의 재벌’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대부업체에서 대출금이 입금됐을 때 울리는 전화를 이른바 ‘해피콜’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급전이 필요했던 재벌 총수들에게 단 회장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바로 해피콜이었던 셈이다.

사채로 돈 불려 부동산 투자해 거부로…다른 사업에서는 고배 마시기도 했다. 단 회장은 젊은 시절에는 사업을 통해서 일군 밑천을 사업 확장을 위해서 재투자 등에 쓰지 않고 사채를 통해서 자금을 굴리며 규모를 키웠다고 한다. 그래서 일찌감치 일찍부터 끊임없이 전국 요지의 부동산을 사들이며 재산을 불렸다.

그는 황해도 서흥 출신이였다. 무일푼으로 서울에 내려와서 악작같이 모든 돈으로 일만상회라는 재봉틀 조립회사를 만들어 돈을 제법 만졌다고 한다.

그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명동을 무대로 사채업에 뛰어들어서 돈을 굴리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로 사채업을 하다가 1960년대에 정부의 주도로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규모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단 회장은 해성산업과 한국제지 등 사업에도 몰두했지만, 그가 재산을 일군 주 영역은 사채업이었다. 이북 출신의 단회장은 남의 돈을 빌려 사업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그는 차입 경영을 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모은 돈을 높은 이자에 빌려주고 받는 식으로 재산 규모를 키웠다.

그는 간혹 경영하는 회사의 실적이 나빠지거나 자금 회수에 문제가 생겨도 절대로 은행에서 차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주요 투자영역은 부동산이였는데, 명동 근처 도심의 땅과 건물들을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에 한강 이남 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강남의 땅도 사들이기 시작했다.

서울 강남의 강남역과 삼성역을 잇는 테헤란로의 해성빌딩 2개 동을 비롯해 서초동 송남빌딩, 중구 북창동의 해남빌딩, 성수동 우영테크노센터, 부산 송남빌딩 등 현재 해성그룹의 주요 자산들은 대부분 단사천 회장이 일궜다.

1970년대 서울시에 기부한 강동구 명일동의 땅 1만2000여평까지 합치면 그가 남긴 부동산 자산은 지금보다 훨씬 많은 규모에 이른다.

단 회장이 1953년 설립했던 한국모방은 당시 섬유 수출 붐을 타고 순항하는가 싶었으나 재투자에 실패하면서 제일모직, 경남모직 등 경쟁업체들에 자리를 내주고 1970년 사라졌다.

사금융 양성화를 목적으로 도입된 단자회사(종합금융사) 설립에서도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단 회장은 1982년 단자회사 설립이 자유화되자, 같은 북한 출신 기업인인 김종호 세창물산 회장, 남상옥 타워호텔 회장 등과 손잡고 신한투자금융 설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동 설립자 간의 경영 분쟁과 정부의 경영 개입 등으로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한 채 결국 지분을 털고 사업을 접었다.

이후 단 회장은 점차 사금융에서 발길을 빼면서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성산업과 한국제지, 계양전기, 한국팩키지 등의 회사를 경영하며 한평생 모은 재산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단사천 회장의 유산, 해성산업이 이제는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고 지적한다.

단사천 회장의 맏손자인 단우영 한국제지 전무가 주축이 돼 지난 2011년 새 복사용지 브랜드인 ‘밀크’를 내놓으며 제지업계에서의 점유율을 높이는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부동산 임대ㆍ관리와 제지, 전기부품 등이 주력이 된 그룹 구조를 감안하면 대규모 인수ㆍ합병(M&A)이나 신규 투자가 없이는 이렇다 할 성장원을 찾기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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